잔인한 걸 보지 못하는 천성 탓인지 현란한 시각효과를 앞세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취향 때문인지 뱀파이어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웬만하면 피가 낭자하거나 시각효과로 도배질을 한 영화 옆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편이고 그렇다 보니 어쩌지 못하는 선입견도 있다. 뱀파이어=피=시각효과=정신없음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건 아무래도 <블레이드> 의 영향이 크다. 시작부터 정신없는 조명과 테크노가 흘러나오는 무도회장에서 피의 샤워를 벌이는 뱀파이어 무리들은 요즘 말로 정말 비호감이다. 온갖 폼을 잡으며 칼을 휘두르는 블레이드 (웨슬리 스나입스) 와 뱀프 간의 피 튀기는 결투도 모든 것이 과잉이라 울렁증만 일으킨다.
조금 다른 영화들이긴 해도 <하울링> 과 <런던의 늑대인간> 같은 영화들이 흥미로웠던 것은 호러라는 스타일 안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주에 걸려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솜씨 있게 적용했기 때문이었지 적어도 호러 때문은 아니었다. 요즘처럼 눈부신 시각효과에 힘입어 스타일을 남발하는 영화들은 겉으로는 현란하고 매끈해 보일지 몰라도 어딘지 공허하다.
나름대로 악연이라면 악연일 뱀파이어가 주인공인 영화 <언더월드> 도 관심 밖의 영화였지만 새삼 흥미를 끈 건 순전히 케이트 베킨세일 덕분이다. 그러니까 <언더월드2> 의 포스터와 사진을 보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앞으로 이 여자를 사랑해야겠다는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 안고 가야 할 과거 같은 영화가 되어버린 셈이다. 일종의 [언더월드2] 를 영화관에서 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랄까.
<언더월드> 는 각각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활동하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을 같은 화면 속에 등장시킨다. 이를테면 <코만도> 와 <람보> 가 대결한다면, <로봇태권브이> 와 <마장가Z> 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같은 궁금증처럼 동종 장르의 라이벌끼리 합종한다는 흥미로운 발상으로 시작한다. 여기에 숨겨진 음모를 파헤치는 미스터리가 더해진다. 영화는 도입부의 현란한 액션 (이 장면은 맥스페인을 보는 것 같다) 이후 숨겨진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 가파르게 달려간다. 모든 음모가 밝혀지고 최후의 대결을 벌이기까지 액션은 최소화 되어 있고 셀린느는 타고난 직관으로 음모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 그 과정에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내통과 배신, 복수를 부르는 해묵은 원한들이 밝혀진다. 두 종족의 표적이 되는 마이클 (스캇 피드만) 이 라이칸족의 우두머리 루시안 (마이클 쉰) 에게 목을 물려 늑대인간이 되고 복잡한 셀린의 감정까지 더해지면서 설정은 한층 풍부해진다.
<언더월드> 는 양 손에 맛있는 걸 잔뜩 쥐고는 어떤 것 부터 먹어야할지 모르는 아이 같다. 매끈한 고딕풍의 화면이 분위기를 돋우고 천 년간에 걸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씨를 말리는 학살의 근원이 강하게 부각되면서도 그걸 주도해 가는 힘은 상당히 빈약하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을 이끄는 크레이븐과 루시안이 서로간의 필요에 의해 모종의 협약을 맺고 하는 일이라곤 약속을 잘 지키라는 말 뿐이다. 실질적인 뱀파이어의 지도자인 빅터가 잠에서 깨어난 이후 빅터와 마이클, 셀린느를 보다 개인적인 관계로 연계시키면서 갈등을 유발하려는 구조는 길고 장황한데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모든 갈등이 무색할 정도로 단순해진다. 어둡고 음습한 뒷골목에서 약에 취해 빙빙 거리는 듯 한 액션도 빠르기만 할 뿐 좀처럼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다.
<언더월드> 가 일정 부분 <매트릭스> 와 <블레이드> 에 빚지고 있고 더 멀리는 <배트맨> 과 B급 호러의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은 애초에 피할 수 없는 약점이자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설정만 남고 모든 것이 증발되어 버리는 것은, 기존 영화의 양식을 끌어오면서 무질서하게 보여주는 것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한 스타일의 한 복판에 자신의 종족을 해치려는 음모,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갈등, 가족을 죽인 진실을 알게 되는 원한의 복수극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그래서 <언더월드> 는 두 편의 영화, 혹은 여러 편의 영화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것 같고 끝내 어긋날 수 밖에 없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운명처럼 장르 간의 합종연횡도 마찬가지의 처지가 된다.
결국,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언더월드> 는 케이트 베킨세일 만세인 영화가 되어 버린다. 달라붙는 검정색 타이즈를 입고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고 허공을 빙빙 날아다니는 케이트 베킨세일은 진지하고 직관적인 성격의 셀린느 역에 잘 어울린다. 그가 출연한 영화중에 이처럼 예쁘고 멋지게 나온 적도 없으니 케이트 베킨세일의 팬이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케이트 베킨세일이 섹시하고 멋지다해도 한참은 부족한 영화의 재미나 뱀파이어가 나오는 액션영화의 선입견까지 상쇄해줄 정도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