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월드 베이스 볼 클래식 4강전을 보면서 아쉽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한 둘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일본에 두 번을 이겼고 예상외의 성적으로 4강까지 진출한 것이니 지더라도 아쉬울 것은 없는 경기였으나 패배의 여파가 크게 느껴졌던 것은 다름 아닌 상대가 일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일본은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영화 <칠석의 여름 - チルソクの夏> 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부산 - 시모노세키 친선 육상 대회에 참가한 일본 선수단은 큰 소리로 응원을 하는 한국 사람을 보고 "한국 사람은 유난히 일본을 이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라고 말한다.
<칠석의 여름> 은 일 년에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하는 견우와 직녀의 설화에서 모티브를 빌려 온다. 처음으로 이쿠코와 대호가 만나게 되는 계기가 일 년에 한 번 치러지는 친선 육상 대회이고 하필이면 육상 대회가 열리는 날이 7월 7일인 것은 "한국과 일본 사이를 칠석에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에 빗대어 그리고 싶었다." 던 감독의 말처럼 보다 직접적으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차용인 셈이지만 비극적인 설화의 주인공이 한국과 일본의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좀 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뿌리 깊은 반목의 역사 앞에 두 소년 소녀의 금지된 우정과 사랑은 필요 이상의 비극으로 몰아가지 않고 특별한 기복 없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1977년 여름, 매년 여름에 열리는 부산 - 시모노세키 육상경기대회에서 같은 종목에 출전한 높이뛰기 선수 엔도 이쿠코 (미즈타니 유리) 와 안대호 (스즈키 준페이) 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한밤에 일본 선수단이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온 대호는 이쿠코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Next year, one more time i meet yoo?", "I promiss you." 첫 눈에 호감을 느끼던 두 사람이 서툰 일본어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은 모든 게 어색하기만 하던 첫 사랑의 달뜬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서슬 퍼렇던 통행금지를 뚫고 달려온 대호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고 이쿠코는 맞은 편 이층 발코니에 마주서서 두루마리 화장지에 립스틱으로 주소를 적어 주고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 그걸 지켜보던 친구들은 "마치 두 사람이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고 얘기한다.
<칠석의 여름> 은 장점이 많은 영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고하는 성장담은 잔잔하지만 차곡차곡 기억의 흔적들을 더듬어 간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그리움을 견디는 이쿠코와 대호의 모습에는 그 나이의 순수함과 무모한 믿음이 있다. 영화는 그들의 우정과 사랑을 곁에서 지켜보며 진심으로 응원한다. 다른 한 축으로는 이쿠코와 친구들 (우에노 쥬리, 카츠라 아사미, 미무라 야스오) 의 우정이 귀엽고 발랄하게 묘사된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나라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들, 이를테면 대를 이어 서로를 미워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정작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면서 무턱대고 화해의 메시지를 던진다는 인상이 들기는 해도 이쿠코와 대호가 어른들의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믿음을 쌓아가는 과정은 감정적으로 설득력이 있고 대호가 일본 라디오를 들으며 배우던 노래를 엔딩 크레딧에서 다시 반복 (1절은 한국어로 2절은 일본어로) 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이 언제까지나 미워하고 반목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니냐는 화해와 소통의 희망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분명하다. 한국인으로서 대호라는 인물의 주변 설정이 빈약한 것은 일본 영화라는 태생적인 한계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아쉽다. 그건 대호 역을 맡은 배우가 일본인이고 영화 속에서 한국말을 잘하지 못 해서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수 백년간을 이어오며 대립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해서다. 대호가 부모님이 이쿠코와의 펜팔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를 큰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개인적인 이유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단순 무신경함과도 일맥상통 한다. 그래서 <칠석의 여름> 이 첫 사랑의 애틋함과 추억의 아련함을 잔잔하게 끌고 가는 것이나 정치적인 메시지를 거창하게 다루지 않으면서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에는 심정적으로 동감할 수 있지만 역사적 과오가 가려지지 않고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화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거품 경제 붕괴의 영향으로 중단된 지 10년 만에 다시 열리게 된 부산 - 시모노세키 친선 육상 대회에서 이쿠코는 대회 운영요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그때와 다름없이 아이들은 한국의 남자아이와 사귀게 됐다고 들떠 한다. 이제는 손 편지가 e메일로 바뀌고 일 년에 한 번 볼 수 있던 것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찾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시간이 흐른 만큼 달라지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긴 시간 동안 젊은 날의 추억을 잊지 못하던 이쿠코와 대호의 질긴 믿음처럼 한국과 일본도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감상적인 결론이다. 과거의 잘못과 역사의 왜곡은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해석을 덜어내고 본다면 <칠석의 여름> 이 주는 정서적인 감흥은 꽤나 큰 편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의 추억과 열정이라는 보편적인 정서에 밀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이 영화를 2004년에 메가박스에서 봤었는데 그 때는 우에노 쥬리가 나온다는 것을 몰랐다. 지금 사진을 보니 우에노 쥬리는 <칠석의 여름> 과 <스윙 걸즈> 를 찍었던 일 년 사이에 참 많이 컸다. 그것도 너무 예쁘고 귀엽게.
2. <칠석의 여름> 은 일본의 대표적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가 2003년에 선정한 그 해의 영화 10에 선정 되었다.
3. 사진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가져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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