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벅스 라이프 - A Bug's Life> 를 봤다. 무려 (!) 8년이 지난 영화인데도 재미가 있었다. 요즘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순식간에 구식이 되어 버리는 세상에 시간이 지나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체로 커다란 미덕이다. 사실, <벅스 라이프> 는 특별히 기억에 남을 영화는 아니었다. 전작이었던 <토이 스토리 - Toy Story> 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봐서인지 선량한 개미들이 힘을 합쳐 나쁜 메뚜기를 퇴치한다는 이야기는 예상보다 심심했고 무엇보다 캐릭터에 정이 가질 않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벌레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단순한 이유이긴 해도 유난히 벌레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결정적인 이유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죠의 아파트> 라는 영화도 재미는 있지만 영 비호감인 영화다. 그러니 제목처럼 내내 벌레들만 나오는 <벅스 라이프> 는 애니메이션의 큰 재미 중의 하나인 친근하고 귀여운 캐릭터를 포기해야만 하는 영화라 재미가 덜한 건 당연했다.
여전히 <벅스 라이프> 는 다른 픽사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처럼 친근하고 귀엽진 않아도 흥미로운 영화였다. 물론, 픽사의 기술적인 진화 과정을 재 확인 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재작년에 개봉된 <인크레더블 - The Incredibles> 의 놀랍도록 선명하고 생생한 화면이 보다 셀 애니메이션에 가까웠다면 <벅스 라이프> 는 말 그대로 더도 덜도 아닌 CG 애니메이션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력 덕분에 실사, 혹은 셀 애니메이션과의 차이를 느낄 수 없게 하는 요즘 CG 애니메이션의 추세로 보자면 지나치게 화사해서 배경이 뭉개지거나 게임 동영상같이 인위적인 냄새가 풍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한계 (인물, 아니 벌레의 표정은 섬세하고 뛰어나다.) 이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벌레들의 캐릭터와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이야기에는 찰기가 있고 정확하게 커트와 쇼트를 나누는 추격전은 웬만한 액션영화를 능가하는 스릴과 속도감마저 있다.


<벅스 라이프> 는 캐릭터가 살아 있다. 9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많은 캐릭터가 나오는데도 하나같이 성격이 분명하고 개성이 넘친다. 주인공인 실수쟁이 플릭을 비롯해 겁 많고 소심한 아타 공주, 무능하고 주책 맞은 여왕, 어리다고 깔보는 것을 싫어하는 호기심 많고 능동적인 꼬마공주 도트, 전형적인 악인인 메뚜기의 대장 호퍼, 영화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서커스단의 벌레와 단장인 벼룩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 몫을 해준다. 대개 픽사 영화의 주인공들, <토이 스토리> 나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같은 영화가 그러하듯이 <벅스 라이프> 도 별 볼 일 없는 실패자가 주인공이다. 플릭은 무엇 하나 잘하는 것 없이 실수만 하는 개미다. 자신은 최선을 다하는데도 하는 일은 늘 꼬이고 엇나가기만 한다. 여름 내내 모은 곡식을 물에 빠트리면서 플릭은 개미들의 왕국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궁여지책으로 힘센 벌레를 찾기 위해 도시로 떠나게 된다. 여기에 서커스단에서 집단 해고당한 벌레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이야기다.
우여곡절 끝에 플릭이 서커스 벌레들을 만나게 되면서 힘을 합쳐 나쁜 메뚜기들을 격퇴한다는 이야기에는 묘한 페이소스가 있다. 흔히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 권선징악의 진부한 교훈은 있어도 무슨 대단한 삶의 비애가 있겠느냐마는 그리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다. 초반부, 서커스 벌레들이 관객의 야유를 받으면서 허둥대는 모습은 '대단한 줄 알았는데 실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라는 영화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슬랩스틱 코미디로 채워지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실수 연발이라 우스꽝스럽고 지지리도 못나서 안쓰러워 보인다. 쓸데없이 착하고 의욕만 넘치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은 플릭과 똑같다.
착한 것은 무능하다 라는 등식이 진실처럼 굳어져 버린 세상 (그건 벌레들의 세상이라고 다를 바 없다) 에서 쫓겨나듯 버려진 그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변의 노골적인 비웃음과 의심 속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열정에 행복해 하는 것도 잠시, 숨겨진 비밀이 탄로나자 아무 말도 못 하고 쫓겨나는 모습에선 영락없는 아웃사이더의 비애가 느껴진다. 주성치 영화의 산란한 개그에서 기묘하게 품어져 나오던 서글픈 정서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의 무대에서 퇴장당하는 플릭의 뒷모습은 처연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고를 치면 끝장이라는 플릭의 절박함이 선의의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나 메뚜기에게 흠씬 쥐어 터지면서도 굴하지 않고 모든 생명은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장렬한 외침에는 찡한 감동마저 있다.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던 메뚜기들을 몰아내는 것은 소수의 영웅 (플릭이나 서커스 단원이 아닌) 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고 무기력했던 개미들이란 점에서 <벅스 라이프> 는 세상의 모든 못난이들을 위한 응원이기도 하다.
플릭이 도트공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돌을 씨앗에 비유하던 장면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은 영화의 이야기를 선명하게 하는 방법이면서 마지막까지 기분 좋은 웃음을 주는 좋은 아이디어다. 영화는 전형적인 갈등과 쉬운 해결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진부할수록 진심에 다가가기 쉬운 것처럼 <벅스 라이프> 의 전형적인 교훈은 가족 애니메이션이라는 한계 안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다. <벅스 라이프> 를 비롯한 모든 픽사 애니메이션의 분명한 장점과 미덕은 최첨단의 기술을 이용하면서도 결코 필요 이상으로 기술에 집착하거나 굴복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중요한 건 이야기다. 그것이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10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임 1. 포스터의 문구처럼 와~ 놀라운 영화다.
2. 원래는 서너줄만 쓰고 말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려던 게 아니었다. 쓸데없이 길기만 한 글을 누가 읽을까. 나부터도 읽기 싫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