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 있는 오래된 TV를 치웠다. 가뜩이나 좁은 방이 날로 늘어가는 잡동사니들 때문에 대폭 정리를 하지 않으면 내 몸 뉘일 자리마저 없어질 것 같아서다. 이번 기회에 쓰지 않아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거나 애정지수가 빈약한 놈들도 치워버렸다. 안 보는 책, 모아놓은 잡지, 5.1채널 스피커등등. 그러니까 봄맞이 창고정리 (내 방은 방이 아니다) 드디어 우리 사장님이 미쳤습니다 정도가 되려나.
참 오래된 TV다. 정확하게는 보통 TV가 아니라 금성 비디오 비전이다. LG도 아니고 금성이라니 갑자기 중늙은이가 된 것 같은데 횟수로 15년이 넘었으니 정말 오래 되긴 했다. 얼마 전에 살펴봤을 때는 전원도 잘 안 켜지고 비디오는 재생을 하자마자 씹히고 꺼내기가 되지 않아서 <당신 손을 잡고 싶어> 라는 영화를 테크가 먹은 채로 버려야 했다.
처음으로 비디오 비전을 사던 날, 커다란 박스를 열면서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던 생각이 난다. 집에도 VCR이 있긴 했지만 비디오 하나 보려면 가족들 없는 시간을 골라서 눈치껏 봐야 했으므로 내 방에 TV와 VCR이 함께 생긴다는 건 곧 나만의 시네마 천국이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비디오 비전을 설치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밤새도록 영화만 봐야지, 하면서 무척이나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서너 개의 비디오테이프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부터는 물 만난 고기처럼 미친 듯이 비디오테이프를 사 모았고 청계천 업자들과의 친분 (?) 도 그 때부터 생겼다.
언제부턴가 점점 TV를 보는 시간이 줄더니 이제는 TV를 켜 본지도 오래 되었다. 방 안에 있는 TV에는 케이블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더더욱 TV를 켤 일이 없는데다 그나마도 컴퓨터에 달려 있는 DVD롬으로 영화를 보는 게 편하다.
막상 버리고 나니 시원하면서도 조금은 섭섭한 느낌이 든다. 평소엔 애물단지처럼 버릴 기회만 엿보던 물건이었는데 처음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산 TV라 그런지, 긴 시간 만큼이나 알게 모르게 정이라도 들었던 것인지. 한 편으론 생각 만큼 공간이 넓어지지 않아서 괜히 버렸나 싶은 생각도 든다. 아마, 멀쩡했으면 좀 더 놔뒀을지도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