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서울 올림픽이 끝난 10월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늦은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면서 곁다리로 흘겨 본 뉴스에는 교도소로 이송 중이던 일단의 범죄자들이 탈주 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이제 중학교 1학년에게 탈주한 범죄자들이 서울로 잠입했다는 소식은 그저 뉴스를 틀면 나오는 흔한 사건사고에 불과했고 아직까지 세상사의 일이 피부에 닿을 만큼 현실감을 가질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탈주범들이 잠입한 은평구라는 곳은 같은 서울이라 해도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을 만큼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설마하니 저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겠어....." 그렇게 내심은 안도하면서 무관심했던 사건이 뒤늦게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던 건 일요일 오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인질극 생중계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모든 관심사는 우연히 동네 만화방에서 본 <영웅본색> 이라는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한 영화에 나온 주윤발이라는 배우와 새로 나온 이문세의 5집중에 어느 곡이 더 좋은가를 두고 동네 친구들과 입씨름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동네 만화방에서 주윤발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는 앞으로 주윤발과 같은 남자가 되리라는 소망을 품은 채로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근처 시장 골목에는 어른들이 모여서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본 TV에서는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인질을 옆에 끼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얼굴과 옷에 묻어 있는 핏자국과 마치 정신이 나간 듯 잔뜩 핏발 선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에게 공포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인질극을 현실에서도 보게 되다니. 그것도 이렇게 생생하게 볼 수가 있다니. 분명 눈으로 보고 있는 건 현실이지만 그것을 진짜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참혹하다. TV는 하나도 남김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피 묻은 옷을 입은 인질범이 조각난 유리를 들고 위협을 하고 집 밖으로 나와 카메라를 향해 무엇인가를 얘기한다. 하나 같이 초점 없는 시선에 잔뜩 화가 나있는 표정은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엔 끔찍하고 무섭다. 어쩌면 사람의 표정이 저리 독할 수가 있을까.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TV 생중계가 지강헌의 요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지만 몇 년전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의 현장을 TV에서 보았을 때 이상의 두려움과 공포는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것이었다.
공포에 질린 인질, 마당을 사이로 대치하고 있는 경찰, 그것을 지켜보던 주민, 그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분주히 오고 가던 TV (그 때는 몰랐는데 꼭 스포츠 중계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생지옥이 따로 없는 아수라장을 지켜보고 있는 나 역시 멍해졌다. 보고 있던 TV에서 시선을 떼고 근처 계단에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제야 아까부터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가 이문세의 5집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기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전에 본 주윤발의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주윤발은 경찰의 추적 따위는 가뿐하게 초월하는 불사신의 영웅이었지만 현실에서 범죄자의 말로는 비참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이문세의 서정적인 노래 소리는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고 내가 느끼는 공포도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