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 (아마 9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은 나지 않지만 <원더풀 데이즈> 의 데모 테입과 시놉시스를 우연히 보게 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 워낙 애니메이션에 무지한 사람의 눈이라는 걸 감안해도 꽤나 감각적인 영상은 세련되고 아름다웠고 캐릭터들 또한 마찬가지로 매력적으로 보였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비관적이고 암울해 보이는 이야기가 진부해 보인다거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그림자가 짙은 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도 상당수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SF 소설에 빚을 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온 세대들이 그 영향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란 어려운 일이니 노골적으로 베끼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듯싶었고 영화를 팔기 위해 만든 데모라는 것을 고려해도 <원더풀 데이즈> 가 보여주는 영상의 매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데모 테입에 들어있던 제작 과정도 무언가 특별한 영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할만큼의 열정과 노력이 충분해 보였다.
그래서 이 몇 분짜리 데모로 제작비를 파이낸싱 받고 해외 프로모션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잘 되기를 바랐고 그 후로 <원더풀 데이즈> 에 대한 이런저런 흉흉한 소식들이 들렸을 때에도 언제가 되더라도 꼭 완성해야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곤 했다. 고작 해야 데모와 시놉을 본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도 없었던 <원더풀 데이즈> 에 대한 기다림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보낸 후에 보게 된 <원더풀 데이즈> 는 그 긴 시간의 기다림을 무심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하는 영화였다. 단 한마디로 얘기 하자면 <원더풀 데이즈> 는 '상당히 아쉬운 영화'다. 그나마 아쉽다는 말이 몇 년간의 믿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최대한의 완곡한 표현이다. 그만큼 실망이 컸다는 말이다. 초기의 근사했던 데모와 시놉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영화가 된 것도 아쉬웠고 근사하게 창조해낸 이미지가 스크린 위에서 겉돌기만 하는 것도 안타까웠다. 조선일보 이동진 기자의 말처럼 '이처럼 아름다운 영상에 이토록 감정 이입이 되지 않을 수 있다니.' 아무래도 취향의 문제만은 아닌 듯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비판했듯이 <원더풀 데이즈> 는 이미지만 남고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공룡 같은 콘셉트 영화의 거의 모든 단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고 또 반대로 그런 것들이 장점이 될 수도 있는 영화다. 아무리 영화가 90분짜리 데모를 보는 것 같아도 <원더풀 데이즈> 가 이뤄낸 기술적인 부분의 성취는 쉽사리 깎아내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특수성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원더풀 데이즈> 의 수많은 시도와 시행착오들을 실패라고 단정 짓기도, 머리와 가슴도 없는 텅 빈 영화라고 몰아붙이기 애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시 중요한 것은 이야기다. 한낱 개인적인 취향일지는 몰라도 보여주기만 하고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들은 참 심심하기만 하다. 아무리 휘황찬란한 이미지들을 덧대어도 그건 이야기를 전달하는 많고 많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정작 이미지가 이야기를 추월하면 망가지는 것은 영화 전체다. <원더풀 데이즈> 를 다시 보면서 '과묵한 사람은 정말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래 할 이야기가 없을 뿐' 이라는 <거침없이 하이킥> 의 한 대사가 생각났다. 그만큼 <원더풀 데이즈> 가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영화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과묵해 질 수 밖에 없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구체화하기 위해 기술이 발전할수록 되레 과묵한 영화들이 넘쳐나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