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결혼은 로맨스의 무덤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지난주 금요일에 방영된 <거침없이 하이킥> 117화를 보면서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충 내용은 이렇다. 순재 (이순재) 가 첫 사랑인 경화에게 편지와 소포를 받게 된다. 그걸 우연히 알게 된 문희 (나문희) 와 가족들은 순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경화와의 연락을 막으려고 한다. 가까스로 불에 탄 주소의 일부를 찾은 순재는 경화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편지는 한 힙합 청년에게 배달되고 그 청년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온 편지에 어이없어하면서 'What A Shit' 을 외치고 어설픈 힙합을 추며 끝이 난다.
일단, 시트콤이니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가야 재미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실제로 재미가 있기도 했다. 바로 전회였던 민용월드 편이 <거침없이 하이킥> 을 통틀어 베스트 에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특별해서 강도가 덜하긴 했지만 뽀글이 파마를 한 서선생과 불타버린 주소를 사이에 두고 순재와 가족들이 벌이는 이야기가 미식축구와 좀비 영화로 패러디 되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은 아무리 요즘 <거침없이 하이킥> 이 러브라인으로 갈지자 걸음을 걷는다 해도 여전히 재미있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What A Shit' 의 충격이란. 그러나 한 편으론 주인공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고 낄낄거리고 놀려대는 걸 보면서 그것이 대부분의 시트콤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방법, 특히 김병욱 피디 시트콤만의 악취미라 해도 꼭 그렇게까지 잔인하고 무참하게 한 남자의 로맨스를 박살을 내야만 했을까 싶기도 하다.
정말 많고 많은 <거침없이 하이킥> 의 러브 라인중에 순재의 로맨스가 기억에 남았던 건 그의 소심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극 중 서민정 선생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경화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헤어지는 에피소드였던 걸로 기억한다. 겉으로는 권위적이고 위엄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실상은 남들 눈이 무서워 전전긍긍하는 순재의 성격상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헤어짐의 순간마저 남의 눈에 띌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당연해 보이면서도 끝내 상상 속으로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순재가 조금은 안타까웠다.
경화의 말처럼 '이제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나이' 에 뭐가 그리 두렵고 무서워서 마음속에 가득 담아놓은 애틋한 감정을 풀어놓지 못하는 것인지. 대놓고 불륜을 해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안타까워 조금이라도 부여잡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잘 가라며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화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드는 순재를 보면서 저 뒷모습이 조금씩 시야에서 사라질수록 앞 날을 장담할 수 없는 이별의 무게가 점점 현실이 되겠구나 싶은 마음에 왜 저렇게 마지막까지 소심해야만 하나 싶어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그때 순재가 떠나보냈던 것은 첫사랑 경화뿐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들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순재의 로맨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문희도 이해가 간다. 순재가 문희를 속이면서 경화를 만났던 전력이 있고 자신에게는 매사에 꼬장꼬장하고 까칠하게 대하는 영감탱이가 다른 여자하고는 나긋나긋하게 편지를 주고받는 꼴이 당연히 못마땅했을 것이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다정한 꼴을 두고 보겠는가. 그건 대부분의 결혼한 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일방적으로 문희의 편을 들어주는 가족들의 매몰찬 반응도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래도 순재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 한 명도 없이 노인네가 또 바람을 피운다는 식으로 대하는 건 너무 했다. 그냥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는 것과 직접 만나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다른 일이긴 해도 애틋한 감정마저 어찌할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막상 결혼해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고 아직 결혼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세상물정 모르는 미혼남의 철없는 한탄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정도만 넘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오래 간직해도 좋을 로맨스가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텐데 현실은 결혼한 사람의 로맨스를 용납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그걸 거침없는 악취미로 승화(?)한 <거침없이 하이킥> 은 더욱 잔인하다. 물론, 그 맛에 김병욱 피디의 시트콤을 보는 것이긴 하자만 말이다.
순재에게 주소를 빼앗기 위해 좀비처럼 다가오는 준하, 민호, 윤호, 하숙족 범이와 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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