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유명한 감독들이 만드는 옴니버스 영화들은 서너 편의 에피소드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 이상이면 산만하고 정신 사납기 십상이다. 아무리 듣기 좋은 풍월도 한 두 번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사랑해, 파리 - Paris, Je T'Aime> 는 무려 18개의 에피소드를 21명의 감독이 만들었다. 조엘 코엔, 에단 코엔, 알폰소 쿠아론, 올리비에 아사야스, 알렉산더 페인, 빈센조 나탈리, 월터 살레스, 웨스 크레이븐, 구스 반 산트 등등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찰 만큼 많은 감독들이 파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짧은 단상들을 만들어 낸다.
당연하게도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감독의 개성과 취향이 묻어난다. 코엔 형제 (블러드 심플, 밀러스 크로싱) 는 파리의 지하철역에서 봉변당하는 미국 관광객 (스티브 부세미) 의 에피소드를 기괴한 유머로 보여주고 올리비에 아싸야스 (이마베프, 클린) 는 프랑스로 촬영을 온 미국 배우와 대마초를 판매하는 딜러와의 엇갈린 감정을 영화 촬영 현장을 배경으로 펼쳐 나간다. 애초에 작은 단편에 불과했던 프로젝트를 크게 벌려놓은 장본인인 톰 티크베어는 한 연인에게 닥친 위기를 <롤라 런> 과 비슷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 속에서 가장 산만한 에피소드 (가장 실망스러운 건 촬영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만든 차이나타운이다) 를 만들어 낸다. 영화제에서 단편을 묶어놓은 섹션들을 봐도 그러하듯이 <사랑해, 파리> 도 각 에피소드 마다 편차가 있다. 그렇다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취향에 달린 것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에피소드는 실뱅 쇼메의 <에펠 탑>, 올리버 슈미츠의 <축제광장>, 빈센조 나탈리 (큐브, 싸이퍼) 의 <마들렌느 구역> 이다. <에펠 탑> 은 외로움이 뼈에 사무쳐 혼자 도시를 배회하며 소동을 일으키던 마임 아티스트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무척이나 환상적으로 그려낸다. 시종일관 낙관적인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는 판타지는 보는 사람마저 따뜻하게 한다. <축제광장> 은 광장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던 청소부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그녀의 품에서 죽게 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한순간에 실직을 당하고 광장을 떠돌던 남자가 칼에 맞아 죽게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도시에서 소외된 자들의 서글픔 같은 것들이 묻어난다.
영화 속에서 가장 튀는 에피소드이기도 할 <마들렌느 구역> 은 파리로 여행 온 젊은 남자 (일라이저 우드) 가 우연히 뱀파이어에게 반하게 되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된다는 이야기다. 인적 없는 파리의 뒷골목을 고딕 호러의 공간으로 바꿔놓으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목덜미를 쥐어뜯으며 애정을 과시하는 마지막 장면은 한없이 웃기거나 매혹적이다. 곧바로 공포 영화의 대가 웨스 크레이븐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것은 가벼운 조크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는 공통적으로 파리의 구석구석을 쫓아가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한 도시의 다양한 공간만큼이나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연도 제각각이다. 주위의 편견에도 사랑을 키워가는 젊은 커플들이 있는 반면에 평생을 권태롭게 살다 못해 헤어지는 순간까지 빈정대는 부부가 있고, 죽은 아들의 그림자를 지워내지 못하는 엄마와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혼자라는 외로움과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이방인, 동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청년과 뒷골목에서 피 칠갑을 해대는 뱀파이어도 있다. 그들은 모두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외로움을 느끼고 난데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한다. 순간순간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낭만적이고 도피적이기보다는 살아가는 현실이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상관없이 나열되는 에피소드와 후일담은 뻔하거나 사족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어떤 믿음이기도 하다. <사랑해, 파리> 는 유명한 영화감독들이 파리에 보내는 헌사나 관광을 부추기는 영화이기보다는,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로 끝나는 첫 번째 에피소드처럼 별다를 것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작은 손짓이다.
덧붙임
출연 배우들도 감독 못지않다. 나탈리 포트만, 일라이저 우드, 줄리엣 비노쉬, 스티브 부세미, 윌렘 데포, 화니 아르당, 마리안느 페이스풀, 미란다 리처드슨, 닉 놀티, 매기 질렌홀, 밥 호스킨스, 지나 롤렌즈 , 벤 가자라, 제라르 드 빠르디유 등등등. 잘 알려진 배우들만 이정도다. 알렉산더 페인과 웨스 크레이븐을 비롯한 몇몇 감독은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