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열세살, 수아> 를 보고 나의 열세 살은 어땠을까 잠시 생각해봤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거의 암흑에 가까운 터라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영화 속의 수아 (이세영) 처럼 일찍 아버지를 여윈 환경에서 자랐던 것도 아니고 뭔가 마음속의 상처가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아직은 질풍노도의 시기라 부르기도 애매한 나이라 남들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성적을 근근이 유지하면서 아무생각 없이 보냈던 거 같다.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그런 시절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수아는 늘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 표현도 잘 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처럼 보인다. 집으로 갈 때 마다 마주치는 토스트 아줌마의 친절에도 별 반응이 없고, 인라인을 타다 누군가에 부딪혀 넘어져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서 숫자를 세는 수아는 오랫동안 혼자인 것에 익숙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 편으론 그 나이의 수아가 감당하기에는 어딘지 버거워 보인다. 원래부터 수아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유난히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던 수아는 2년 전 아버지가 죽고 나서 눈에 띄게 말 수가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수아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심각한 장애가 생기거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열세살, 수아> 는 보기 드물게 우울한 성장영화가 됐을지도 모른다. 먼저 친구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발가락에 매니큐어를 칠하면서 깔깔거리기도 하는 수아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가늠하기 힘든 그 나이만큼의 아이다.
출구 없는 감정은 환상으로 이어진다. 가수 윤설영 (김윤아) 을 진짜 엄마라고 생각하는 수아의 환상은 꼭 아버지의 죽음만이 아니라 수아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들과 맞물린다. 수아는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걸 모른 척 할 정도로 철이 없지는 않지만 교복이 크다며 투덜거리기도 하고 언제 집에 놀러 가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어쩔 수 없이 움츠려든다. 늘 먹고 사느라 바쁜 엄마 (추상미) 에게 쌓인 불만과 자꾸 고물상 아저씨가 엄마와 자신의 일상에 끼어드는 것도 싫다.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귀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수아의 환상은 자신과 주변을 부정하는 것에만 한정되고 그럴수록 큰 힘을 얻는다. 수아가 아버지의 일기에서 발견한 하나의 단서는 아빠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이자 갑갑하고 칙칙한 현실에서 벗어날 유일한 출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수아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몇 차례 보여지는 환상은 밝고 화려한 뮤지컬의 형식을 취한다.
수아의 환상이 과거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엄마에 대한 또 다른 긍정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분명 덜 세련되고 지나친 친절처럼 보인다. 꼭 굳이 말로 설명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 전까지 별 다른 과장 없이 소소하게 감정을 쌓아오던 영화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쉽게 납득할만한 정서적인 감흥을 준다. 장차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게 될 노란 식당차를 타고 아버지와 작별하는 꿈을 꾼 수아는 비로소 현실과 마주 대한다. 깨어진 환상은 또 다른 환상으로 이어지지만 현실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연결된다. 먼동이 터오는 아침에 열 세 살의 수아는 피하고 싶었던 엄마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반 뼘 정도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덧붙임
결혼해서 이세영 같은 딸을 낳는 게 현실적일까, 아니면 내가 이세영하고 결혼하는 게 더 현실적일까. 나이 서른이 넘은 남자가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