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 (이윤미) 는 가리봉에 산다. 선화는 구로공단의 카스테레오를 만드는 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구로공단에 대대적인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다니던 공장이 화성으로 이전하자 선화는 새 직장을 알아보려고 하지만 여의치 않다. 결국 선화는 회사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하고 가리봉동을 떠난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선화는 마음이 좋지 않다. 임신한 친구 향미 (장선연) 는 선화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선화는 가리봉을 돌아본다.
영화 <가리베가스> 는 선화가 가리봉동의 벌집을 떠나는 하루를 보여준다. 채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쪽방. 환기가 되지 않아 자주 선풍기를 돌려야 하고 여름이면 푹푹 찌는 방안, 테니스 공으로 막아놔야만 하는 하수구의 악취, 남편을 잃고 넋이 빠진 채로 혼자 사는 아래층의 아줌마는 선화가 5년 동안 지냈던 이곳의 익숙한 모습이다. "그래도 여긴 가리봉동에서 제일 해가 잘 드는 옥상이 있어" 서 좋다. 지금이야 새로 짓는 건물에 막혀 잘 보이지도 않지만 선화는 가리봉동을 떠나는 오늘처럼 너른 볕에 잘 마른 뽀송뽀송한 빨래를 걷고 멀리 전철역을 내다보면서 고단한 하루 속에서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선화는 가리봉동을 떠나면서 자신의 방을 쓰게 될 외국인 노동자에게 이곳에서 지내야 할 방법을 친절하게 일러준다. "당신이 어느 나라에서 왔건 간에, 이곳을 떠날 때는 부디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어요," 라는 덕담과 함께...
그런데 정작 선화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구로공단과 가리봉역이 구로 디지털 단지와 가산 디지털 단지역으로 바뀌기 전부터 20대의 반을 이곳에서 보냈던 선화는 수많은 중국간판과 가게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북적이는 시장 골목, 거대한 크레인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지금의 가리봉동에서 이방인 같다. 5년 동안 살았던 가리봉동의 벌집에서 선화가 찾아낸 것은 수 십 만원의 보증금과 장롱 밑바닥에 있던 낡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전부고 잠시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추억에 젖는 일 뿐이다. 좁은 쪽방에서 유일한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을 장롱은 조각조각 분해되는 것도 모자라 그마저도 부서지고 만다. 장롱 문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선화는 "이 장롱이 어떤 장롱인지 아세요," 라고 소리쳐 보지만 결국 부서진 장롱을 버리고 떠난다. 부서진 장롱은 선화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좁은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벌집 같다고 해서 붙여진 가리봉동의 벌집과 구로공단은 재개발의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조선족과 외국인 노동자의 터전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단지라는 새 이름만큼이나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곧 있으면 가리봉이란 동네의 이름도 바뀌고 재개발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세상이 바뀌니 사람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우리 누나도 여기에서 일했어요" 라던 이삿짐 아저씨의 말처럼, 한 때 대한민국 수출액의 10%를 벌어들이며 산업화의 주역이란 허울뿐인 이름으로 고단하게 살아왔을 그 많은 선화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혹은, 어디로 가야만 했을까.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