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영화 <이블 데드> 로 이름을 알린 샘 레이미는 자신의 영화적 동지를 이끌고 아주 재미있는 코미디 한 편을 만든다. <크라임 웨이브> 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허드서커 주립 교도소 (여기에서 각본이 누군지 알아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로부터 시작된다. 한 남자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서 있다. 연쇄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에젝스 (리드 버니) 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교도소의 간수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마치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이 사형 집행인과 참관인은 에젝스가 빨리 사형의자에 앉기만을 바라고, 죄가 없다고 울부짖는 그의 얘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사형 집행 시간을 앞당겨 놓기까지 한다. 시시각각 죽어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무죄를 증명할 길이 없는 에젝스는 과연 어떻게 위기를 모면할까.
<이블 데드> 에서 편집 조수로 일했던 코엔 형제가 샘 레이미와 공동으로 각본을 쓴 <크라임웨이브 - Crimewave, 1985> 는 억울한 누명을 쓴 한 남자의 과거를 거침없이 돌파한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싸구려면 싸구려인대로 그것이 즐거움이 되기도 하는 저예산 영화의 매력은 엉뚱하고 기발하다. 예산과 시간에 제한을 받되, 상상력에는 제한이 없다.
연쇄 살인자와 무고한 아파트 주민들의 쫓고 쫓기는 슬랩스틱 코미디는 시작부터 끝까지 쉴 틈 없이 물고 물린다. 등장인물을 불러내는 초반을 제외하면 따로 클라이맥스가 없을 정도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낡은 아파트에 제정신을 가진 인물들은 하나도 없고, 30년대 영화를 연상시키는 배우들의 연기, 종횡무진 하면서 곳곳을 날아다니는 카메라, 구체적인 이야기와 상황들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어 있다. 오데가드 & 트렌드 회사의 공동 창업자인 오데가드가 회사를 몰래 팔아치우려는 음모를 꾸미자 트렌드 (에드워드 R 프레스만) 는 오데가드를 청부 살인한다. 이유는 한 가지. 사랑하는 아내 헬렌 (루이스 레저) 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는 로맨틱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청부 살인을 맡은 살인자 (폴 스미스, 브라이언 제임스) 들이 너무나 멍청하고 바보 같다는 것이다. 한 남자가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순수한 의도 (?!) 로 시작된 청부살인은 점점 일이 커지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루니 툰의 영화판이기도 할, 헬렌과 연쇄 살인자가 닥치는 대로 집기를 던지고 부수면서 벌이는 추격전은 좁은 아파트의 내부에서 시작해 밖으로까지 이어지고 쫓고 쫓기는 자의 심리적인 간격, 공포에 질린 표정을 급격한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면서 극도로 과장해 나간다. 날아드는 접시와 프라이팬, 꽃병은 시점샷으로 보여지고 살인자는 연달아 볼링공을 맞아도 끄떡도 하지 않을뿐더러 손가락으로 바닥을 찍어 카펫과 집기들을 끌어오는 괴력을 발휘한다. 난데없이 나타난 수십 개의 문을 지나 왈츠 음악이 흘러나오면 쫓고 쫓기는 자는 어느 새 춤을 추는 파트너가 된다. 악전고투 끝에 살인자를 물리쳤다고 생각한 헬렌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는데 하필이면 그곳은 우루과이행 화물 상자 속이다. 그걸로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을 헬렌은 영화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고? 맞다. 동업자의 배신과 청부살인이 아내의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더군다나 겉으로 보이는 트렌드와 헬렌은 다정다감한 부부와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에 에젝트가 연쇄 살인의 누명을 쓰는 것도, 낸시가 수녀가 되어 나타나는 것도 죄다 말이 안 된다. 근데, 그게 <크라임 웨이브> 의 재미다. 살인범과의 격투 끝에 3층에서 떨어진 남자는 살아남았다고 기뻐하는 순간 바로 차에 치여 죽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말썽꾸러기 꼬마가 범인은 우리 아빠예요, 라는 한 마디에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고한 남자를 체포한다. 웃으면서 죽은 남자의 시체가 버려지는 곳은 '크리스마스에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세요.' 라고 적힌 구세군의 자선함이다. 이런 난센스는 안면 몰수하고 시침 뚝 떼야 더 재미가 있는 법이다.
히치콕을 비롯한 고전 스릴러와 톰과 제리, 루니 툰 같은 카툰을 패러디의 소재로 삼으면서 기막히게 비틀어 내는 솜씨는 타란티노도 울고 갈 만큼 재미있고 웃길뿐더러, 많이 본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어떤 경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포복절도할 코미디지만 텅 빈 도심에서 비명을 지르며 질주하는 짧은 장면에서는 소름 돋는 공포감을 맛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샘 레이미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브루스 캠벨은 공동 제작자 외에 여자를 등치는 비열하고 느끼한 바람둥이로, 코엔 형제와 샘 레이미의 동생 테드 레이미는 사형장을 취재하는 사진기자와 레스토랑 웨이터로 잠깐 출연한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남는 의문 한 가지. 우루과이로 날아간 헬렌은 어떻게 됐을까. 그건 샘 레이미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본 사람에게만 남겨놓는 작은 선물이다.
덧붙임
<크라임 웨이브> 의 마지막 자동차 추격전은 <다크맨> 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그대로 쓰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꼽는 샘 레이미의 베스트도 앞의 두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