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마리옹 (줄리 델피) 과 잭 (애덤 골드버그) 은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이틀 동안 마리옹의 부모 집에서 머물게 된다. 파리에 도착한 첫 날부터 잭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약간은 괴팍해 보이는 마리옹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인데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리옹의 다른 모습을 보는 것도 적응이 안 된다. 말도 통하지 않고 관습도 다른 파리에서 잭은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줄리 델피가 대본을 쓰고 연출한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 - 2 Days In Paris, 2007> 는 참으로 수다스럽다. 보는 사람에게 환상을 심어주기 충분한 파리라는 특수한 공간, 그 곳에서 펼쳐지는 프랑스 여자와 미국 남자의 연애담은 서로 다른 나라와 환경에서 지낸 시간만큼이나 많은 차이와 오해를 만들어내고 쉴 새 없는 수다로 이어진다. 파리의 골목을 누비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수다는 심지어 섹스를 할 때도 멈추지 않고 대상도 가리지 않는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느냐 버스를 타느냐로 시작된 가벼운 수다는 프랑스가 테레 단체와 연계되어 있다는 이야기로 번지다가 미국에 대한 농담으로까지 이어진다. 테러 공포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잭이 부시를 지지하고 다빈치코드를 좋아하는 얼빠진 미국 관광객들에게 일부러 엉뚱한 길을 가르쳐주자 마리옹은 "같은 미국 사람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당신 너무 못됐지만 그래서 사랑스러워" 라고 키스를 퍼붓는다. 이쯤 되면 마리옹과 잭은 천생연분이라 불러도 무방할 텐데 그게 꼭 그렇지 많은 않다.
세상은 좁고 사람들은 연결되어 있어서 지구 어디를 가더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작은 세상' 이론이 왜 들어맞지 않는거냐며 투덜거리던 잭은 곧 그 이론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들어맞는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다. 문제는 그 이론이 마리옹의 전 남자들에 한해서만 절묘하다는 것이다. 마치 운명적인 인연이라 되는 듯이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마리옹의 전 남자들을 보면서 잭은 마리옹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마리옹까지 갸우뚱하게 된다. 대체 내가 알고 있던 그 여자가 맞을까, 라는 고민에 휩싸이는 것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고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더욱 힘들다. 그것이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둘은 사랑해서 끊임없이 부딪힌다. 나를 만나기전에 몇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었을까 라는 본능적인 질투는 둘째 치고 정신과 상담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마리옹을 잭은 이해 할 수가 없다. 물론 마리옹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에 비하면 다른 남자와의 오럴은 사소한 것이고 대놓고 인종 차별 하는 놈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봉사하러 간답시고 아이들을 성추행하는 인간은 갈아 마신다 해도 속이 시원치 않다. 또 과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약간의 거짓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잭과 마리옹의 방식이고 차이다.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 는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이해와 관찰이 필요할 지도 모를 두 연인의 갈등을 흥미롭게 풀어놓지만 정작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싱거운 편이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수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하면 강한 면역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는 이론까지 들먹이지만 '결국 사랑' 이라는 모법답안은 급하게 풀어낸 수학공식 같은데다 '언제까지 처음 같은 열정이 지속될 수 없고 금방 지겨워질지는 몰라도 뭐, 어떤가. 그냥 그뿐이다' 라는 <이터널 선샤인> 식의 정서적인 설득과도 상당히 거리가 멀다. 표면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맞는 마리옹과 잭의 로맨스는 미친 듯이 사랑하다 헤어져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반복되는 '그렇고 그런 연애담' 이 하나 더 늘은 것처럼 보인다. 그걸 염두에 뒀다면 줄리 델피는 무척이나 성공적인 두 번째 연출작을 만든 셈이다.
덧붙임
그래도 이 아름답고 명민한 배우를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수다도 재미있었다. 저 아래 보이는 분은 실제 줄리 델피의 아버지라고 한다. 완전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