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 적 살던 집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다. 작은 나무도 두 그루쯤 있었고 담벼락 주위에 장미며 코스모스, 봉숭아 같은 꽃들이 참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그 너른 마당에 땅을 파서 김장독을 묻었다. 지금이야 김장을 하는 집도 별로 없(는 거 같)고 마당이 있는 집은 더더욱 찾기 힘들지만 늘 11월쯤에 하게 되는 김장은 집안의 큰 행사였다. 온 집안 식구와 동네 아줌마들이 절인 배추를 헹구어 내고 배추에 들어갈 양념을 만들고 또 손으로는 그걸 버무리면서 동네방네 오지랖 넓은 얘기들을 하던 모습들이 아직도 선하다.
절인 배추에 양념을 싸서 한 입씩 얻어먹는 맛도 좋았지만 뭐니 해도 김장의 참 재미이자 대단원은 담근 김치를 항아리에 넣어 땅속에 묻을 때다. 땅이 얼기 전에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갓 담근 김치들, 그러니까 배추김치, 총각김치, 동치미를 항아리에 담아 묻고 나면 그제야 김장은 끝이 난다. 그걸 담당하는 것은 늘 아버지만의 몫이었고 어린 마음에 김장이라는 큰 행사를 마무리 짓는 아버지가 그렇게나 대단하고 자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김장에 도움을 주거나 했던 적은 없다. 그저 마루에 배 깔고 누워서 만화책을 보거나 그것도 지겨워지면 그 모든 것을 어슬렁거리며 지켜보기만 했다. 어쨌든 그렇게 땅 속에 묻은 김치는 한 두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 맛을 낸다.
2. 이상하게도 땅 속에 묻어둔 김장 김치가 더 맛있었던 거 같다. 특히 동치미는 더욱 그랬다. 배추김치나 총각김치 같은 것들은 일 년 내내 지겹도록 먹을 수 있지만 동치미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어서 더 특별했던 거 같다. 뭐니 해도 동치미는 춥고 칼바람 부는 야심한 밤에 소면에 말아 먹어야 제격이다. 더울 때 뜨거운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동치미 국수에는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이유가 없다. 잘 익은 동치미와 소면만 있으면 그만이다. 약간은 달짝지근하면서 시원하게 착 감기는 국물, 아삭하게 씹히는 무. 살짝 말아 넣은 면. 거기다 동치미에 넣은 고추를 고명으로 얹으면 그걸로 딱 좋다. 고작 초등학생의 유치한 입맛이 동치미의 그 깊고 깔끔한 맛을 제대로 느꼈을리는 없었겠지만 일단 살짝 얼은 동치미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쫄깃해진 소면을 한 젓가락 후루룩 넣으면 그보다 더 시원하고 맛난 야식은 없었다.
"동치미 국수 먹을 사람 여기 붙어라" 라는 아버지의 달콤한 선동에 제일 먼저 일어나 껑충껑충하게 엄지손가락에 붙은 기억이 새삼 정겹다. 늦은 밤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동치미 국수를 먹으며 얼마나 떨었던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동치미 국수처럼 간편하고 맛있는데다 계절의 운치까지 더해주는 먹을거리가 또 있을까 싶다. 물론 오밤중에 동치미 국수를 만들어야 했던 엄마는 고역이었겠지만 말이다. 갑자기 왜 동치미 국수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 시원한 동치미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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