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불안하지 않은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대단하고 편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영화 속의 맥켄지 (다니엘 크레이그) 는 잭 스탁스 (에이드리언 브로디) 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켜버린 맥켄지의 무안한 변명이기도 하겠지만 갈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적응하거나 튕겨져 나가기에도 버거운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신경 쇠약을 불러오는 위태로운 현실에서 평정을 유지하기란 힘들다. 잭과 재키 모녀가 처음 만나게 되는 도입부에서 과민하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엄마 (켈리 린치) 와는 달리 어린 재키가 잭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 것은 평화와 안온함이 사라져버린 어른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끝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 인간의 미련한 속성인지 근래에 시간 이동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다시 돌아갈 수 없거나 경험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대리 만족, 시간의 재구성이 주는 쾌감이 썩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후회와 되돌림. 그리고 덧없음이다. 가장 최근에 개봉된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의 마코토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되돌리기 위해 구르고 또 구른다. <레트로 액티브> 의 카렌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지만 일은 더욱 복잡하게 꼬이고 만다. 또, 가장 웃기는 시간 이동 버전은 주성치의 <서유기 월광보합> 일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무언가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불안하고 영화는 현실 반영과 도피의 상반된 기능을 충실히 해낸다.
걸프전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은 잭 스탁스는 미국으로 돌아온 뒤 경찰 살인 사건에 연루된다. 술 취한 여성과 어린 딸의 자동차를 고쳐준 뒤 우연한 사고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무죄 판결을 받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잭은 베캣 박사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의 치료를 받는 도중 시체 보관함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잭은 사고를 당하기 전에 만났던 소녀 재키 (키라 나이틀리) 와 다시 재회하고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잭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찾아 나선다.
걸프전, 기억 상실증, 살인사건, 정신 병원, 환자를 압박하는 도구로 쓰이는 재킷, 시체보관함, 미래, 시간이동, 비인간성, 모녀, 죄책감. 이 여러 개의 키워드는 <더 재킷 - The Jacket, 2005> 의 이야기를 이루는 중요한 단서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기도 하다. 이미 커다란 상처를 받은 잭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시체보관함의 어둠속에 가둬놓고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베켓 박사의 이론, 그러니까 일명 자궁 치료법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고 잭의 혼란한 정신 상태를 계속 파고드는 중요한 장치이지만 정신 병원에 입원되어 있는 현재와 시간 이동을 하는 미래, 고통스런 기억이 뒤섞인 과거는 아무 상관없이 나열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냥 밑도 끝도 없는 파편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억 때문에 뒤죽박죽인 채로 살고 있는 재키에게서 엄마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을 크게 발견해내기란 힘들다. 누구 말마따나 철없는 10대의 반항처럼 보인다.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공포를 눈앞에 두고도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재킷과 시체 보관함의 폐쇄 공간이 만들어 낸 망상이었다면 차라리 더 좋았을 것이다. 너무 뻔하다 해도 에이드리안 브로디의 연기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아쉽게도 배우들의 연기를 제외한 <더 재킷> 의 모든 요소는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 에서 언급된 할리우드 법칙의 부정적인 면만 더 돋보이게 한다. 소재를 끌어왔다고 그게 주제가 되지는 않듯이 전쟁의 상처로 시작된 이 혼란스런 스릴러, 혹은 휴머니즘의 영화에서 걸프전 증후군과 인간성의 상실을 읽어내는 건 거의 기계적인 강박증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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