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 - 投名狀, 2007> 은 <자마 - 刺馬 ,1973> 의 전체를 리메이크하지 않는 대신에 중요한 골격을 가져온다. 알려진 것처럼 <자마> 의 이야기와 여러 설정은 상당부분 바뀌었다. 대신 <명장> 은 '너희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거나 말거나 여러 사람의 앞길에 방해가 되니 죽어줘야만 한다' 는 <자마> 의 직설적인 비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세밀하게 다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거리를 떠돌던 방청운 (이연걸) 은 도적 떼의 두목 조이호 (유덕화) 와 강오양 (금성무) 을 만나게 된다. 청운은 군대에 들어가지 않겠냐는 권유를 하고 세 남자는 투명장을 받들어 의형제를 맺는다. 하지만 난세에 피로 맺어진 세 명의 영웅담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생사의 고락을 함께 하던 세 남자는 단단하게 결속되는 듯 보이지만 애초에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청운은 이호 무리들을 밑천 삼아 대의를 이뤄낼 심산이었고 이호와 오양은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군대에 들어간다. 게다가 이호는 세상을 호령하겠다는 야심마저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들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투명장 (投名狀) 으로 결의를 맺는 것도 대단한 신의를 주고받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믿을 수 없으니 패거리에 들어와 피로서 보증을 세우라는 뜻이다.
공동의 목적이 없었던 이들은 무언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과 맞닥트리면서 점점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부녀자를 강간한 병사를 두고 시작된 청운과 이호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된다. 완전히 다른 가치관의 대립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조짐은 소주성 전투 이후 완연하다. 9개월간에 걸친 태평천군과의 전투는 추위와 굶주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모든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 혼자 성으로 들어가 결판을 내려했던 이호는 태평천군의 우두머리와 대면하고 자살에 가까운 그의 죽음을 목격하고부터 청운의 뜻을 따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얼마간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힘을 길러 세상을 평안하게 하겠다는 청운의 대의와 명분이 아무리 그럴 듯하다 한들 당장 그걸 감수하기엔 눈앞에서 벌어지는 희생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이호는 자신이 속한 형제라는 테두리 외에도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것에 눈을 뜨게 된다.
청운과 연생 (서정뢰) 이 무엇 때문에 끌리게 되는지 명확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처럼 보인다. 피난길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운명적으로 재회하는 것에 비해 둘의 감정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내중의 사내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자마> 와는 달리 뚜렷한 이유가 없으며 연생의 캐릭터는 세 남자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원작의 팜므파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넘어 거의 극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배역에 가깝다. 애초부터 남자들이 주고받는 감정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진가신은 치정에도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청운과 연생의 관계는 꽤 근사하다. 왜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 설명을 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라는 설득력을 준다. 장면 하나로 백 마디의 말이 필요 없게 만드는 진가신의 연출 스타일을 생각해 보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청운과 연생은 평온함이라고는 찾을 길 없는 현실에서 막연한 도피를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철의 영화로는 드물게 새로운 시도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어찌됐건 <자마> 는 무협이라는 틀 안에 있는 영화이고 결기를 단단하게 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분명한 인물의 성격이다. 마찬가지로 <명장> 에는 똑같은 인물들이 나온다. 직선적인데다 물정 모르는 주인공들은 복잡하고 잔인한 세상의 질서에 채이다 파멸을 맞이한다. 그나마 현실적인 청운도 모든 것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 볼 만큼 강심장이 아니다. "내 인생은 살얼음판과 같았어. 저 강을 건널 수 있을까" 라고 자조하면서 이호를 제거하는 청운은 살고 죽는 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만 사사로운 갈등과 후회보다 세상은 빠르고 비정하게 움직인다. 조정의 관리들이 바둑을 두며 계략을 꾸미는 것은 이들의 예정된 운명에 관한 직설적인 비유일 것이다. 그 어쩌지 못하는 운명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다.
음모에 가담한 주변인들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개죽음을 당해야 했던 <자마> 의 결말을 지독한 냉소로 본다면 <명장> 의 암울한 결말 또한 당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명장> 은 전쟁영화도 아니고 무협영화는 더더욱 아닌 모양새가 되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세 남자의 운명을 고스란히 담아내려고 한다. <자마> 와는 다른 의미에서 무척이나 불편한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