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중국영화계를 이끈 사람, 여민위> 는 중국영화 초기의 대표적인 영화인이었던 여민위 (黎民偉) 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혹시 홍콩 영화에 관심이 많다면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의 이름은 관금붕 감독의 <완령옥 - 阮玲玉, 1991> 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중국 영화계의 전설적인 스타였던 완령옥이 언론에 의해 부도덕한 여자로 매도당하고 자살하기까지의 일을 실제 출연한 배우의 인터뷰(장만옥, 유가령, 양가휘등) 와 극으로 옮겨낸 이 영화에서 여민위는 그리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손유와 복만창, 채초생 같은 젊은 감독들을 지원하여 <여신> 과 <고도춘몽>, <신여성 - 新女性, 1935> 같은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제작자겸 감독이다.
성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사진의 매력에 빠져있던 청년 여민위를 영화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손문 (孫文)' 이었다. 당시 부패하고 무능한 청나라 조정에 반대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을 이끌었던 손문과 영화를 조합하는 것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여민위는 손문의 인격과 사상을 지지했고 극단을 만들어 '반청혁명' 을 선동하는 연극을 만든다. 일찍부터 연기에 눈을 뜬 그에게 총과 칼 같은 무기를 드는 것보다는 자기의 재능으로 사회변혁을 돕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극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반청혁명에 참여하던 여민위에게 우연히 접하게 된 영화 (電影) 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부추긴다. 그는 20살의 나이에 미국인 영화제작자 브라드스키를 만나 한 편의 영화를 만들게 된다. 불륜을 눈치 챈 남자가 아내를 죽인다는 내용의 <장자시처 - 莊子詩妻, 1913> 는 홍콩에서 제작된 최초의 영화로 기록된다. 또한 외국에서 최초로 상영된 중국영화이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반청혁명을 위한 선전기록영화를 만들게 된다. 영화가 역사를 기록하고 선전의 기능을 담당하던 그 시기에 여민위도 영화를 마찬가지의 도구로 삼았다. 카메라를 들고 사선에서 혁명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내는 것이다. 비로소 여민위의 존재가 드러난 것도 손문의 연설과 전투가 담긴 기록영화 한 편이 베이징 필름보관소에서 발견되면서부터다. 이처럼 손문은 여민위에게 절대적인 존경과 행동의 대상이었다.
여민위는 무척이나 손문을 존경했어도 국민당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는 손문이 죽은 후, 내전과 권력 다툼의 격변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국민당, 공산당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대신 뜻 맞는 동지들과 설립한 연화영화사 (聯華電影公司) 를 통해 다양한 영화를 만든다. 대부분은 로맨스와 코미디, 반전영화였지만 그 안에서 사회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었고 그 중심에는 완령옥 (阮玲玉) 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가 있었다. 이 다큐의 후반부는 완령옥을 꽤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그 시기의 완령옥은 대중들로부터 커다란 사랑을 받은 거의 최초의 '무비스타' 였을 뿐 아니라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중국의 비루한 현실을 보여주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여민위가 지향하는 바와도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완령옥의 비극적인 죽음은 영화사와 여민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완령옥이 자살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관금붕의 영화와 다큐를 짜 맞추면 대충 이렇다. 완령옥이 출연한 <신여성> 이라는 영화가 기자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자 기자들은 사실을 왜곡했다며 수정을 요구한다. 감독 채초생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완령옥이 거부하자 신문은 악의적으로 완령옥의 사생활을 들추기 시작한다. 완령옥을 둘러싼 남자들은 돈을 위해 거짓을 일삼고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도망치기에 급급한다. 완령옥은 하루아침에 대중의 스타에서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천박한 악녀로 낙인찍힌다. 결국 세상 사람들의 말이 두렵다는 유서를 남기고 완령옥은 자살을 택하고 급작스레 스타를 잃은 영화사는 재정위기에 직면한다. 물론 완령옥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표면적인 이유는 스캔들이었지만 당시의 극심한 좌,우 대립과 남성위주의 사회는 그의 죽음에 더 큰 정치,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여지가 많다.
완령옥의 죽음은 연화영화사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서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쉽게도 여민위가 찍은 상당수의 영화는 일본군의 폭격에 불타거나 베이징으로 운반하는 도중 배가 침몰하여 수장되었다. 영화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시작부터 국가와 민족이었고 평생 그를 이끌던 신념이었던 것 같다. <중국영화계를 이끈 사람, 여민위> 는 그런 그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사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도 그는 소형 EKA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생각한 여민위는 영화를 대중의 삶을 깨치는 선동, 계몽의 도구로 여겼다.
영화는 '영혼의 건축물이 되어야 한다' 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여민위는 전쟁터와 상하이, 홍콩등지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중국 영화의 아버지로 불렸고 동시에 영화를 통해 변화를 꿈꾸었던 순진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중국영화계를 이끈 사람, 여민위> 는 그런 그의 일생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다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