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들은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여자의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소심하고 유약한 남자는 여자의 당차고 활기찬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되고 여자는 한없이 착해 보이는 남자가 맘에 든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착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와요..." 내가 착한 것도 남이 착한 척 잘해주는 것도 싫다던 이기적인 여자와 집과 직장을 오가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남자는 그렇게 자신에게는 없거나 부족한 면에 이끌려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둘 만의 완전한 감정에 빠져들게 했던 모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권태로운 일상이 반복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내기를 주저 하지 않는다. 그렇게 헤어진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기억을 지운다.
영화 속에서 클레멘타인 (케이트 윈슬렛) 은 충동적으로 기억을 삭제하고 조엘 (짐 캐리) 은 잊혀 졌다는 배신감에 지우려 한다. 서로를 향한 설렘과 흥분이 지겨움과 권태로 바뀌면서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없게 된 그들은 기억을 제거하면서 미에즈윅 박사 (톰 윌킨즈) 에게 상대에 대한 비난과 증오를 쏟아내지만 오히려 함께 나눴던 대화, 서로를 향했던 몸짓과 손짓들, 그리고 둘을 헤어지게 만든 오해와 불신의 상처를 마주 대하는 순간 그것들을 쉽사리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기억을 묶어 두려는 조엘의 필사적인 노력은 사랑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단순히 잊고 싶은 기억들만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까지 조각내고 지워 버리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과정이 된다. 조엘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 기억이 삭제되는 걸 막아보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이미 기억을 삭제당한 클레멘타인은 사라진 기억의 흔적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기억을 지워버린 그들은 진정 행복해진 것일까?
"지금은 내가 좋을지 몰라도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을 거야....." 영화 <아비정전> 에서 주인공은 (장국영) 는 헤어지기 싫다며 매달리던 수리진 (장만옥) 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기억 속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공은 잊혀지지 않기 위해 먼저 떠나 버리는 사람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떠남으로써 더 많은 기억을 만들어 낸다. 너무 많은 기억들 속에서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도 기억되기를 거부하면서 완벽하게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킨다. 결국 그래서 상처 받는 건 남은 사람이 아니라 먼저 떠났다고 믿고 있는 자신이다.
어쩌면 <이터널 선샤인 -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기억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에게, 혹은 사랑이 남긴 추억과 상처를 극복하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은 위안 같은 영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뿐 아니라 미에즈윅 박사와 매리 (키에스틴 던스트) 또한 기억은 지워져도 사랑했던 감정만은 어쩌지 못했던 것처럼 언제까지 처음 같은 열정이 지속될 수 없고 금방 지겨워질지는 몰라도 "뭐, 어떤가 (okay)." 그냥 그뿐이다.

덧붙임
그래도 기억을 지우시고 싶으십니까? 라쿠나사의 웹 사이트를 방문해보세요.
http://www.lacunainc.com/





덧글
버트님/ 지금 가면 딱 좋겠네요. 눈도 내려주면 더 좋겠구요.
몬톡이 아니더라도 겨울 바다 한 번 가봤으면 좋겠습니다..여자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기전에 먼저..:-)
렉스님/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영화였지만 누군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어주고 있는 느낌이 드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봐야할 영화가 최소한 몇 편은 더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코미디언이 명확해보이던 '라이어라이어'를 참 좋아하지만.
오래전 썼던 글이지만 트랙백겁니다.
저도요..둘이 다시 만난다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케이 이 말을 들으니 그냥 좋더군요...;;
ArborDay님//
전 발랄한 짐 캐리가 더 좋아서 앞으로도 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대한극장은 적당히 붐비지 않아서 좋긴 한데 좀 그런 면에서 안 좋죠.
jeen님//
저도 자주 뵙겠습니다..
(짐캐리 말고 누가 그 역을 그렇게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역은 몰라도...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