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21 09:39

기억을 지우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 이터널 선샤인, 2004 f i l m



  

   여기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들은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여자의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소심하고 유약한 남자는 여자의 당차고 활기찬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되고 여자는 한없이 착해 보이는 남자가 맘에 든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착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와요..." 내가 착한 것도 남이 착한 척 잘해주는 것도 싫다던 이기적인 여자와 집과 직장을 오가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남자는 그렇게 자신에게는 없거나 부족한 면에 이끌려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둘 만의 완전한 감정에 빠져들게 했던 모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권태로운 일상이 반복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내기를 주저 하지 않는다. 그렇게 헤어진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기억을 지운다.


   영화 속에서 클레멘타인 (케이트 윈슬렛) 은 충동적으로 기억을 삭제하고 조엘 (짐 캐리) 은 잊혀 졌다는 배신감에 지우려 한다. 서로를 향한 설렘과 흥분이 지겨움과 권태로 바뀌면서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없게 된 그들은 기억을 제거하면서 미에즈윅 박사 (톰 윌킨즈) 에게 상대에 대한 비난과 증오를 쏟아내지만 오히려 함께 나눴던 대화, 서로를 향했던 몸짓과 손짓들, 그리고 둘을 헤어지게 만든 오해와 불신의 상처를 마주 대하는 순간 그것들을 쉽사리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기억을 묶어 두려는 조엘의 필사적인 노력은 사랑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단순히 잊고 싶은 기억들만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까지 조각내고 지워 버리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과정이 된다. 조엘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 기억이 삭제되는 걸 막아보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이미 기억을 삭제당한 클레멘타인은 사라진 기억의 흔적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기억을 지워버린 그들은 진정 행복해진 것일까?


   "지금은 내가 좋을지 몰라도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을 거야....." 영화 <아비정전> 에서 주인공은 (장국영) 는 헤어지기 싫다며 매달리던 수리진 (장만옥) 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기억 속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공은 잊혀지지 않기 위해 먼저 떠나 버리는 사람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떠남으로써 더 많은 기억을 만들어 낸다. 너무 많은 기억들 속에서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도 기억되기를 거부하면서 완벽하게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킨다. 결국 그래서 상처 받는 건 남은 사람이 아니라 먼저 떠났다고 믿고 있는 자신이다.


   어쩌면 <이터널 선샤인 -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기억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에게, 혹은 사랑이 남긴 추억과 상처를 극복하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은 위안 같은 영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뿐 아니라 미에즈윅 박사와 매리 (키에스틴 던스트) 또한 기억은 지워져도 사랑했던 감정만은 어쩌지 못했던 것처럼 언제까지 처음 같은 열정이 지속될 수 없고 금방 지겨워질지는 몰라도 "뭐, 어떤가 (okay)." 그냥 그뿐이다.


덧붙임

 

그래도 기억을 지우시고 싶으십니까? 라쿠나사의 웹 사이트를 방문해보세요.
http://www.lacunai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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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터널 선샤인 - 기억보다 소중한 사랑 2005/11/21 14:59 #

    이 영화에 관한 글을 며칠 전에 썼는데 못다한 얘기가 있어서 이렇게 적는다. 전에 쓴 글을 다시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 일부분은 겹치는 부분이 있고, 따지고 보면 전체적으로 동어반복이기도 하다. 스포일러는 (내가 생각하기엔) 없는 글인데 영화를 본 사람은 좀 더 이해하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사실 영화를 기억나는대로 복기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해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억보다 소중한 사랑'에 대한 단상을...... more

  • 이터널 선샤인 - 사랑했던 모든 기억을 긍정하라 2005/11/22 02:36 #

    소심하고 말수가 적은 조엘(짐 캐리 분)은 활달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꿈만 같던 연애는 서로의 성격 차이를 확인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하고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워주는 라쿠나 사에서 조엘의 기억을 없애려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조엘도 라쿠나 사에서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없애지만 그 과정에서 추억의 소중함을 깨닫고 어떻게든 추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씁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달콤한 시간...... more

  •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 2005/11/22 11:13 #

    2005.11.10 개봉 / 108분 / 드라마,로맨스,SF / 미국 / 국외 / 씨네서울 / IMDb / OutNow / RT 기억은 언제나 뇌리 속 저 깊은 곳에 잠복해 있다 한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회로를 어지럽히곤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래는 다가오지 않은 상태고 현재는 금방 휘발 되고 말며 그리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건 과거의 기억들뿐"이라고. 누구나 지우고 싶은 기억과 잔존시키고 싶은 기억의 기로에서 방황에 빠져듭니다. 꼭 감상적 순간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미필적 고의의 반복, ...... more

  •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11/23 00:44 #

    이 영화 로맨스물이라기보다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부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간중간 대사들은 앞서 인용한 책에서 읽어왔던 것들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 대해 평론가들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보낸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비록 인간과 기억에 대한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이전에도 있어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특이한 로맨스물은 두 번째 감상에도 머리속을 복잡하게 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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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한 나라의 도로시 :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 - 2 Days In Paris 2007-12-06 10:32:15 #

    ... 게 꼭 그렇지 많은 않다. 세상은 좁고 사람들은 연결되어 있어서 지구 어디를 가더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작은 세상' 이론이 왜 들어맞지 않는거냐며 투덜거리던 잭은 곧 그 이론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들어맞는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다. 문제는 그 이론이 마리옹의 전 남자들에 한해서만 절묘하다는 것이다. 마치 운명적인 인연이라 되는 듯이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마리옹의 전 남자들을 보면서 잭은 마리옹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마리옹까지 갸우뚱하게 된다. 대체 내가 알고 있던 그 여자가 맞을까, 라는 고민에 휩싸이는 것이다. 둘은 끊임없이 부딪힌다. 나를 만나기전에 몇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었을까 라는 본능적인 질투는 둘째 치고 정신과 상담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마리옹을 잭은 이해 할 수가 없다. 물론 마리옹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에 비하면 다른 남자와의 오럴&lt;이터널 선샤인&gt; ... more

덧글

  • saramazi 2005/11/21 11:21 # 삭제 답글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지는데요. :)
  • 버트 2005/11/21 11:42 # 삭제 답글

    몬톡으로 기차여행을 몹시 떠나고 싶게 만들어준 영화였죠. 지금이 딱 그 시즌인데, 아마도 지금 그곳에 도착하면 눈이 마구 내릴지도 모르겠네요. Montauk Beach에 서서 자신에게 말을 걸 펑키한 여인을 찾는다. 흠.
  • 아우라 2005/11/21 13:40 # 답글

    짐캐리가 좋아지는 영화...^^
  • 렉스 2005/11/21 15:08 # 답글

    차갑지만 따스한 여운의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예찬 같았어요 :)
  • 도로시 2005/11/21 22:39 # 답글

    saramazi님//저도 종영하기 전에 한 번은 더 보고 싶습니다..

    버트님/ 지금 가면 딱 좋겠네요. 눈도 내려주면 더 좋겠구요.
    몬톡이 아니더라도 겨울 바다 한 번 가봤으면 좋겠습니다..여자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기전에 먼저..:-)

  • 도로시 2005/11/21 22:46 # 답글

    아우라님//트루먼쇼, 맨 온더 문...다 못봤으니 저한텐 짐 캐리가 웃기는 코미디언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그런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의 나레이션이 참 낮설었습니다.

    렉스님/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영화였지만 누군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어주고 있는 느낌이 드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 나이스 2005/11/21 22:59 # 삭제 답글

    마지막의 '뭐 어때'란 말 한마디가 주는 울림이란...대단했습니다...
  • Capella 2005/11/21 23:05 # 답글

    와우~ 라쿠나의 홈페이지가 있었군요! 아무튼 사랑이란 어쩔수 없나봐요. 잘 보고 갑니다
  • ArborDay 2005/11/23 00:38 # 답글

    트루먼쇼, 맨온더문을 다 못 보셨다니 좋으시겠습니다.
    봐야할 영화가 최소한 몇 편은 더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코미디언이 명확해보이던 '라이어라이어'를 참 좋아하지만.
    오래전 썼던 글이지만 트랙백겁니다.
  • 한나 2005/11/28 15:05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마지막 대사는 정말 좋았어요. <떨리는 가슴>이라는 드라마의 Non, Je Ne Regrette Rien 이란 곡이 생각났어요.

  • 멜로팝콘 2005/11/29 00:45 # 답글

    너무 좋은 영화였어요...ㅠ 저도 대한극장에서 봤는데 이래저래 불만이 참 많았었다는..;;
  • jeen 2005/12/09 12:19 # 답글

    잘쓰시네요^ㅜ^ 정말 멋진 영화였어요. 자주 들르겠습니당.
  • 도로시 2005/12/11 21:28 # 답글

    나이스, 한나님//

    저도요..둘이 다시 만난다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케이 이 말을 들으니 그냥 좋더군요...;;

    ArborDay님//

    전 발랄한 짐 캐리가 더 좋아서 앞으로도 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 도로시 2005/12/11 21:29 # 답글

    멜로팝콘님//

    대한극장은 적당히 붐비지 않아서 좋긴 한데 좀 그런 면에서 안 좋죠.

    jeen님//

    저도 자주 뵙겠습니다..
  • 닥슈나이더 2006/07/24 19:09 # 답글

    그래도 짐캐리 최고의 영화는... 마스크입니다....
    (짐캐리 말고 누가 그 역을 그렇게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역은 몰라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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