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심은 건달들의 최후 도피처다. by 도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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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용문객잔> 은 내일이면 문을 닫을 복화극장의 마지막 상영에 관한 이야기이다. 마지막 상영작은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 - 龍門客棧, 1968> 이며, 몇 안 되는 관객 중에는 마오티엔이 있다. 차이밍량 영화에서 늘 아버지로 출연하는 그의 데뷔작이 바로 <용문객잔> 이다. 그리고, 이 날은 다리를 저는 극장의 매표원 (첸상치) 과 젊은 영사기사 (이강생) 가 만날 수 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일은 <용문객잔> 이 상영되는 두 시간동안 벌어진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영화소개를 일부 수정해서 옮겨놓긴 했지만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 - 不見不散, 2003> 은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복화극장이 내일이면 문을 닫게 되는지, 영화를 보던 중년의 남자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 매표원과 영사기사 사이에 애틋한 감정이 있는지는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다. 차이밍량 영화답게 대사와 음악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극장 안에서 상영되는 용문객잔의 대사와 효과음, 발자국과 빗소리 같은 주변 소음만이 복화극장의 적막함을 채운다.
이처럼 <안녕, 용문객잔> 은 관객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좀체 입을 떼지 않으면서 극장 안과 바깥의 움직임을 긴 호흡으로 담아낸다. 몇 몇의 관객은 텅 빈 객석을 놔두고 지근거리에 모여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옮긴다. 매표원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영사실과 스크린 뒤를 오고 간다. 고정되어 있는 카메라는 그들이 왔다가 멀어지고 기다리다 엇갈리는 순간을 끈질기게 바라본다. 멀리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공명하다. 그래서 <안녕, 용문객잔> 은 기다림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
"이 극장에는 유령이 살고 있어요. 여기가 귀신들린 곳이라는 거 아십니까." 이 대사는 정확히 영화가 시작하고 44분 4초가 되서야 나온다. 길고 긴 침묵속의 첫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늘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지만 발 길이 끊긴 극장에서 누군가를 훔쳐보는 게이 청년의 기다림은 대상이 없으며 매표원은 끝내 영사기사와 엇갈린다. 어쩌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공간과 그 곳을 떠도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현실의 유령일지도 모른다. 응답할 수 없는 기다림,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것의 끝은 조용한 사라짐뿐이다. '이제 누구도 우릴 기억하지 못한다.' 는 영화 속 배우들의 눈물과 긴 담배연기가 겹치는 복화극장의 마지막은 쓸쓸하다.
영화는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관객이 사라진 극장 안을 5분여의 롱테이크로 지켜본다. 묘하게도 카메라의 위치는 영사기와 객석이 전면으로 보이는 스크린이다. 다시 영사기의 불을 밝히지 못할 이곳에서 과거에는 수많은 사람이 울고 웃으며 잊지 못할 추억과 꿈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속 영화, 현실과 환상이 겹친 <안녕, 용문객잔> 은 영화와 극장에 대한 차이밍량의 추억이자 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서글픈 '작별' 이다. 영화, 안녕용문객잔, 차이밍량, 이강생, 첸상치, 양귀매, 극장, 영화관, 폐관, 침묵, 기다림, 마지막, 작별, 호금전, 용문객잔
1. 명동 시네 콰논이 폐관한단다. 정확한 폐관 이유가 뭔지 알 길은 없지만, 영화관의 위치도 안 좋은데다 (명동의 어지러운 간판들 사이로 수줍게 묻혀있어 눈 똑바로 뜨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일본 영화에 대한 무관심, 바로 앞에 씨너스가 있으니 장사가 안 된다는 이유도 있겠지. 폐관을 앞두고 4일부터 6일까지 땡큐페스티벌이라는 행사를 한다. 씨네콰논 회원은 모든 영화가 무료, 비회원은 3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북적거리는 멀티플렉스를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작고 조용해서 혼자 찾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영화관들이 사라지는 건 아쉽다. 씨네콰논에서 꽤 맘에 드는 일본 영화를 많이 봤었기에 더욱.
2. 이연희의 사이버 샷W 광고 사진. 별로 안 예쁘게 나왔다 해도 이연희는 이연희. (누르면 커지긴 하는데 이번 사진은 별로 안 커져요;;;;;)
3. 오늘처럼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것도 안 오는 것도 아닌 날. 못(MOT) 의 음악이 당긴다. 그래서 하루 종일 듣고 있다. MP3 플레이어의 용량이 커서 좋은 건 그 날 그 날에 따라 내키는 대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미리 미리 변환해두길 잘 했다. 근데, MP3가 좋아봤자지만 옙 특유의 빈티나는 음질은 분위기 확 깬다.
영화관에 예의 없는 인간들이 출몰한다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피해를 봤다는 증언은 끝도 없다. 처음엔 깜도 안 되는 미미한 족속들이었으나 휴대폰과 멀티플렉스의 급속한 팽창과 함께 마치 좀비처럼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타고난 무례함으로 주변 사람의 혈압과 분노지수를 상승시키는 이것들은 마땅한 퇴치 방법도 없다. 그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그까짓 예의 좀 없으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라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 아래 더욱 번식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스위니 토드> 를 볼 때 예의 없는 것들을 만났다. 한 30분쯤 영화를 보고 있는데 앞에 있던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뭐라 뭐라 조잘 거린다. 영화가 재미없었던 모양이다. 한두 번이야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다. 근데 계속 휴대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시간을 본다.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한다. 요즘 휴대폰 액정이 좀 밝고 눈이 부신가. 그러더니 문자를 주고받는다. 한 15분 동안 열 번이 넘는 문자가 오고 갔나 보다. 그 와중에도 남자와 여자는 계속 영화가 재미없다면서 누가 보러 오자고 했느냐고 투덜댄다.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라 그냥 들린다. 작은 소리와 움직임에도 민감한 나는 영화가 눈에 안 들어 온 지 오래다.
열이 뻗쳐서 영화고 뭐고 둘이 뭐 하는지를 지켜봤다. 나중에는 문자를 보내거나 조잘대는 것도 질렸던지 휴대폰으로 게임을 한다. 이런 싸가지 없는 사람들 좀 보게. 이제는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저기요, 휴대폰 불빛 때문에 신경 쓰이거든요. 조심 좀 해주실래요." 그렇게 한마디 했더니 들은 척 만 척 제 할 일만 한다. 한 술 더 떠 일부러 엿 먹이려는 심산인지 아예 대놓고 통화를 한다. 통화 내용도 가관이다. "영화 보러 왔는데 영화도 재미없고 뒤에 웬 또라이 같은 사람이 귀찮게 한다. 짜증나"
당신들만 짜증나는 게 아니다. 피 같은 돈과 시간을 들여 영화를 보러 왔는데 당신들 같은 예의 없는 인간 때문에 영화 감상을 방해 받는 나도 짜증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한테 악감정을 가져야 하는 것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영화관의 예의 없는 사람들 얘기는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늦게 와서는 자기 자리 찾아 앉는다며 휴대폰으로 여기 저기 비추는 사람, 발로 의자를 툭툭 차는 사람,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 특히 휴대폰 비싼 거 샀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은 으뜸으로 재수 없다. 그 모든 것을 다 하는 멀티 플레이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무리 영화 시작 전에 잘생긴 장동건이 휴대폰을 끄라고 친절하게 말을 해도 들어먹지를 않는다. 또, 영화가 재미없다고 딴 짓만 하면서 왜 끝까지 보는지 이해가 안 간다. 다 즐기자고 보는 영화인데 억지로 자리를 지키느라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다. 정 재미없으면 나가면 그만이다. 그게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여태의 경험으로 보면 저런 예의 없는 것들은 구제불능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알아야 될 이유도 없다. 내 입 가지고 얘기하고 내 휴대폰으로 문자 보내는 데 너희들이 뭔 상관이야 그런 심보니 잘잘못을 가려봤자 혈압만 상승하는 일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한다. 문제는 피해야 할 똥이 어쩌다 한두 번 있는 게 아니라 지뢰처럼 널려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그게 영화관의 익숙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영화에 몰입해서 나오는 적절한 반응과 떠들썩함은 옆 사람에게도 쾌감을 전해주지만 요즘 영화관의 모습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현실의 피곤함을 피해 들어온 영화관에서 도피의 환상을 보장받지 못하는 건 끔찍하다. 대신 타인에 대한 순간의 분노, 살의 같은 폭력적인 충동만 늘어간다. 어쩔수 없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벤자민 바커의 면도칼로 예의 없는 것들을 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단 코엔, 클로드 를루슈, 아톰 에고얀, 챠이 밍량, 구스 반 산트, 엘리아 술래이만, 켄 로치, 아모스 기타이, 조엘 코엔, 라스 폰 트리에, 데이빗 크로넨버그, 난니 모레티, 빌 어거스트, 뤽 다르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빔 벤더스, 로만 폴란스키, 헉헉. 아직 멀었다. 이제 길고 긴 명단의 겨우 중간일 뿐이다. 다시 숨을 고르고, 레이몽 드파르동, 제인 캠피온, 장 이모우, 유세프 샤힌, 월터 살레스, 쟝 피에르 다르덴, 라울 루이스, 첸 카이거, 허우 샤오시엔, 왕가위, 올리비에 아사야스, 아키 카우리스마키,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마이클 치미노, 테오 앙겔로풀로스, 기타노 타케시.
그다지 영화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이름이고 그보다 더 많은 관심이 있다면 이름만 들어도 황홀해 하며 밤새 좋아하는 영화와 장면을 놓고 수다를 떨게 할 유명한 영화감독들이다. 개중에는 왜 여기에 이름을 올렸을까 의아한 사람도 눈에 띄지만, 흔히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칸 영화제의 단골손님이자 집행부에서 총애해 마지않는 로열패밀리들이라는 것이다. 칸 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해 만든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 - Chacun Son Cinema Ou Ce Petit Coup Au Coeur Quand La Lumiere S'Eteint Et Que Le Film Commence, 2007> 은 이들의 영화를 발견하고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명성을 준 칸 영화제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다.
이 종합선물세트에는 영화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감독들이 같은 주제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을까, 싶은 생각에 잠시 투덜거리게 된다. 여기에는 주최 측이 원하는 범위에 맞춰 영화를 만들어 낸 모범생도 있고 그렇지 않은 반항아도 있다. 영화관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총 서른네명의 감독이 만든 서른세편의 단편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는 감독의 스타일만큼이나 다양하고 빛이 나지만 한 편으론 소화불량에 걸리기 십상이다. 3분이라는 시간 동안 영화관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원칙은 진지하고 유머러스하며 때론 낭만적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영화를 모두 언급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대충만 추려보자면,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영화관에서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유태인의 이야기를 한 장소에서 한 컷으로만 찍어 이 프로젝트의 제작비를 절감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감독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폭력적인 충동을 보여준다. 두 에피소드는 감독이 주연을 겸하고 있는데 망치로 사정없이 머리를 박살내는 라스 폰 트리에의 연기는 정말 끔찍하면서도 웃기다.
구스 반 산트는 스크린 속의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노라고 수줍게 고백하고 클로드 를르슈는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영화관에서 만나 결혼을 했고 영화감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영감을 주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가장 낭만적인 기운을 풍기는 에피소드들이다. 특히 끌로드 를르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영화관 안에서 밀고 당기는 연애담은 할리우드의 고전 멜로 영화를 연상케 한다. 영화 속에 흐르는 'cheek to cheek' 을 따라 부르며 데이트를 신청하는 장면은 왜 끌로드 를르슈가 <남과 여> 라는 멜로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왕가위와 차이 밍량은 영화관의 어두컴컴한 공기 속에서도 특유의 색감을 보여주며 아모스 기타이와 빔 벤더스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현재도 변함이 없는 영화관 바깥의 일들을 이야기 한다. 허우 샤오시엔의 카메라도 여전히 묵직하다.
가장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꼽으라면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상영하는 도중 전기가 끊기자 꼬마들이 자전거로 전기를 만들어 내 영화를 보는 첸 카이거의 <Zhanxiou Village> 다. 천진난만하게 채플린의 영화를 보며 웃는 아이들과 마지막에 숨어있는 작은 반전은 찡한 울림을 준다. 또, 영화관에서 가장 억세게 재수 없는 사람은 남녀의 정사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어서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받는 이층에서 떨어진 한 남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시네마 에로띠끄) 일 것이다. 이 서른네명의 감독에게 영화란 무엇일까. 혹은 관객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빌 어거스트의 <The Last Dating Show> 에서 한 남자는 덴마크어를 모르는 여자를 위해 영어로 통역을 해주다 주위에 있는 관객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남자와 여자, 소란을 피운 몇 명은 쫓겨난다. 헬멧을 가지러 다시 상영관으로 간 남자는 영화에 빠져 여자를 내버려 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함께 소란을 일으킨 세 남자는 혼자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고 남자는 뒤늦게 여자를 찾아보지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결국 남자가 여자를 찾아낸 곳은 영사실이다. 혹시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배반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보다 만 영화의 다음이 궁금해서 못 참을 지경이고 영사실에 모여 숨을 죽이며 영화를 보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로미오와 줄리엣> 을 보고 있는 관객의 다양한 표정만으로 에피소드를 채워 놓는다.
그들은 하나 같이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공유한다. 각각 다른 생각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영향을 주고받는 그 기묘하고 전율스런 감정의 교류는, 영화관만이 가진 독특한 정서다. 그것은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춰놓는다 한들 집 안에서 혼자 보는 영화가 뭐 그리 재미있을까. 앞서 말했던 첸 카이거 영화의 결말이 감동스러운 것은, 꼬마와 시각 장애인 사이에서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소통의 느낌 때문이다. 그것이 유럽의 어느 낡고 오래된 영화관이건, <키즈 리턴> 과 <400번의 구타> 를 상영하는 일본과 브라질의 작은 영화관이건, 혹은 영화를 보는 것이 마을의 잔치가 된 중국의 어느 외딴 마을이건 불이 꺼지고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스크린에 투영되면 모두를 사로잡는 그 중독과도 같은 마법은 영화가 주는 가장 환상적인 선물일 것이다.
덧붙임 한글 제목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된 제목을 따랐음. 영화제에서 보고 난 다음 끼적거린 메모에 기초한 글이라 영화에 대한 기억이 틀릴 수도 있음. 사진은 네이버 영화. 영화, 그들각자의영화관, 칸영화제, 영화관, 스크린, 감정, 교류, 소통, 부산국제영화제, 극장, 왕가위, 차이밍량, 첸카이거, 데이빗크로넨버그, 라스폰트리에, 압바스키아로스타미, 코엔형제, 올리비에아싸야스
하루 종일 다른 일은 안 하고 영화만 보면서 산다. 한 때 나마 열렬하게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었을 궁극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광주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 적이 있는 <시네마니아 - Cinemania, 2002> 는 그런 사람들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영화다. 고령의 할머니부터 중년의 이혼남, 젊은 청년까지. 다섯 명의 사람들은 자칭 타칭 시네필이라 불리는 대단한 영화광이다. 대부분은 특별한 직업도 없이 혼자 살고 있으며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근근이 생활하면서 하루의 전부를 영화관에서 보낸다. 그들은 일반적인 복합상영관과 소규모의 아트 하우스를 찾아다니고 TV와 비디오로 매년 600편이 넘는 영화를 본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그들이 사는 곳은 뉴욕이다.
으레 대부분의 영화광이 그렇듯이 다섯 명의 시네필은 남들보다 많이 봤다는 것을 자랑스러운 듯 여기고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할 때면 영화광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은근하지만 대단한 자부심도 엿보인다.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때는 마치 갓 사랑에 빠진 달뜬 소년 소녀들 같다. 그들은 자주 가는 영화관에서 만나 얼굴을 익히고 어느새 친구가 된다. 혼자만의 감상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면서 직접적인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영화광으로서는 부러울 것 없는 하루하루를 사는 셈이다. 아마도 이들 같은 열성적인 시네필이 있었기에 뉴욕의 시네마테크 라이브러리는 더 풍성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들 다섯 명은 진정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한 편으론 막막한 현실에 대한 도피의 방법으로 시네필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하루 종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모자라 혼자 집에 있는 시간에도 비디오를 틀어놓는다. 정성이 대단하다고 감탄만 하기에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영화에 쏟아 붓고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그래서 직업과 가족 없이 살아야 하는 그들은 영화 이외의 것들이 위태롭고 삐걱거린다. 그들에게 영화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사회, 경제적으로 막혀있는 욕구를 해소하려는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방식처럼 보인다. 스스로도 그렇노라고 고백한다. 뉴욕 시내의 영화관과 거리, 집에서 벌어지는 인터뷰는 점점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왜 그런지에 대한 나름의 사연들도 있다.
하루 종일 영화만 보고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춘 뉴욕에서 과연 다섯 명의 시네필은 영화광으로서 또는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언제나처럼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면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어진다. 오직 영화관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집 근처에 CGV가 생겼다. 버스를 타고 가기엔 애매하고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주로 시내에서 영화를 봐서 생긴 지도 몰랐다. 늦게 알아서 그렇지 더 오래전에 생긴 모양이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 집 근처 CGV에서 <본 얼티메이텀> 을 봤다. 같은 CGV 체인이니 시설은 특별히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았다. 큰 쇼핑몰이 있거나 유동인구가 많은 곳도 아니고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많지도 않은 주택가에 위치해서 그런지 조금 한산했다. 이번 주에 가장 예매율이 좋다는 <본 얼티메이텀> 을 두 번째로 큰 상영관 (그래봐야 이백석이 좀 넘는다) 에서 10명 남짓한 관객들과 봤다. 아무래도 <본 얼티메이텀> 같은 영화는 적당히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봐야 더 제 맛인데 그게 좀 아쉽다.
오랜만에 썰렁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려니 자주 찾던 대한극장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 들으면 뭐 저런 바보가 다 있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대한극장을 좋아하는 건 딱 한가지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적당함. 워낙 막귀에 막눈이니 사운드 시스템이 어떻고 화면비가 어떻고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적당히 붐비고 또 적당히 한산하기도 한 대한극장의 분위기가 맘에 든다.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내 자리에 앉아 있다가 불이 꺼지면 좋은 자리를 골라서 앉아도 되는, 메가박스나 CGV처럼 너무 붐벼서 영화를 보기도 전에 지치게 만들지도 않고 너무 썰렁해서 영화 보는 맛을 반감시키지도 않는 그 적당함. 언제나 대한극장은 그랬다. 같은 공간 안에서 내가 느꼈던 즐거움을 옆 사람도 느끼고 그게 온 극장 안으로 퍼져 나가는 걸 확인할 때의 쾌감. 그 말 못할 정도의 짜릿함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이기도 할 텐데 그게 빠진 영화 관람은 어딘지 싱겁고 못내 아쉽다. 그렇다고 <본 얼티메이텀> 이 싱거웠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처음 입장권을 모으기 시작한 건 소유욕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초등학생 5학년 때부터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했다. 매달 스크린이나 로드쇼를 사면 부록으로 끼워주는 포스터를 애지중지 하며 모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포스터며 팸플릿, 전단지, 로비카드, 공중전화 크기의 카드 (이걸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신문 광고, 기사, 잡지 등등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내가 얼마만큼이나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일종의 애정의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종종 사랑에 눈이 먼 나는 이른 새벽에 극장에 가서 포스터와 로비카드를 떼어오거나 바깥에 전시되어 있던 대형 홍보물을 낼름 집어 오기도 했다.
멀티플렉스가 보편화 되기 전에 보통 극장 매표소 옆에는 포스터와 로비 카드를 붙여 놓았다. 정보가 많지 않던 때라 영화의 인상적인 스틸과 포스터는 관객을 유혹하는 나름의 홍보수단이었다. 그건 다시 말해 컬렉터의 애정지수를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수집대상이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극장에서는 쉽게 떼어가지 못하도록 스테이플러를 수십 개씩 박아 놓는다. 여기서 지금은 소용없는 팁 하나. 그걸 손으로 떼다보면 손톱에도 무리가 가거니와 심한 경우 포스터나 로비카드가 찢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애써 떼는 보람도 없고 손상된 부위만큼이나 마음도 아프다. 그래서 하루는 어떡하면 손쉽게 뗄 수 있으면서 손상이 가지 않게 할까, 를 고민하다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펜치를 이용하는 것. 펜치로 스테이플러를 반으로 자르면 쉽게 떼어 낼 수도 있고 그만큼 손상 부위도 적어진다. 아무래도 불법적인 일이라 작업 시간 (?) 을 배로 단축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작업의 능률이나 효용성면에서도 펜치 이상 가는 것은 없다. 역시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아우토반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보통 이상의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붓지 않는 한 유지하기 어려운 취미 생활이다. 말이 쉽지 일주일에 한 번씩 극장 순례를 하며 포스터와 로비 카드, 전단지를 가져 오거나 세 개의 스포츠 신문과 두 개의 종합 일간 신문의 영화 기사와 광고를 스크랩하는 일은 꽤나 심한 중노동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홍보의 수단이 다양하지 못했던 시기에 신문광고는 절대적인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신문 하단에 빽빽하게 들어찬 광고를 일일이 오리는 일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 에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대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아무리 영화를 마음속 깊이 좋아하고 사랑한다 해도 하루가 다르게 쌓여만 가는 자료의 양은 부담스럽고 점점 나이를 먹어가니 그것도 귀찮고 쪽팔려서 더는 못 할 짓 (아직까지 그러고 있는 모군에게 경의를) 이었다. 아직까지 입장권을 모으는 것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별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입장권을 모아놓은 상자를 뒤적거렸다. 한동안 입장권을 정리하지 않아서인지 수백 장의 입장권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그 중에서 꽤 오래된 입장권도 눈에 띈다. 연한 녹색 바탕에 파란 스탬프로 찍혀있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의 학생 입장권 가격은 2000원이다. 1987년도니 참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입장료인데 얼마 안되는 용돈을 받는 처지에 이것도 부담이 됐던 기억이 난다. 녹색 입장권을 보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지금은 영화관 마다 입장권이 다르지만 당시 녹색 입장권은 모든 극장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1990년 겨울에 입장권의 크기와 색깔이 바뀐 이후에도 한물 간 영화들을 동시 상영하던 재개봉관은 계속 녹색 입장권을 사용했는데 그런데는 입장권을 주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관객이 매표소에서 구입한 입장권의 반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동시 상영관에는 지정좌석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 입장권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일종의 탈법이었다. 원래 한번 판매한 입장권은 다시 팔 수 없게 되어있지만 대부분의 극장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한 마디로 돈이 됐기 때문이다. 관객이 산 입장권을 뜯지 않고 모아 놓으면 다시 팔수가 있어서 들어온 수익만큼의 세금을 더 내지 않아도 됐었다. 그런 사정을 알 길 없던 난 왜 입장권을 안주냐고 따져 묻고 악착같이 받아냈다. 멋도 모르는 어린놈이 입장권을 달라고 들어가지도 않고 버팅기고 있었으니 극장 측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고 열불이 터졌을까.
그렇게 모으기 시작한 입장권이 십 몇 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니 참 많아졌다. 그동안 이렇게나 많은 영화를 봤단 말인가 싶어 새삼 놀랍다. 아마, 그중에 기억나는 영화는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누렇게 변해버린 입장권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지나간 추억이 떠오른다. 앞의 장황한 이야기도 입장권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떠오른 기억에 의지해서 쓴 것이다. 입장권에 찍혀져 있는 날짜와 시간, 그리고 영화의 제목은 흐릿해진 기억들을 구체적으로 불러 오는 것 같다. 갈수록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많은 요즘, 모아 둔 입장권으로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도 꽤 은근한 재미가 있다. 덧붙임 이번 기회에 관계자분께 죄송 하다는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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